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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학 (19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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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명학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인물로, 함경남도 영흥 출신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사 학위를, 경성제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외과 의사로, 조선총독부병원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 근무했다. 1930년 함흥에서 개업 후 함경남도 도회의원을 지냈으며, 1935년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되었다. 함흥 축구단을 창단하고 단장을 맡는 등 스포츠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일제 말 징병제 실시 감사 담화 발표, 흥아보국단 및 조선임전보국단 활동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해방 이후 월남하여 의료 활동과 스포츠계 활동을 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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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학 (190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명학
원래 이름金明學
출생일1901년 9월 8일
사망일1969년 4월 23일
본관수안(遂安)
출생지대한제국 함경남도 영흥
거주지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함흥
대한민국 서울
사망지대한민국 서울
정당무소속
재임 기간
임기1931년 1월 31일 ~ 1932년 2월 9일
총독사이토 마코토 (일본)
우가키 가즈시게 (일본)
군주히로히토 (일본)
총리하마구치 오사치 (일본)
와카쓰키 레이지로 (일본)
주석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업 및 경력
직책조선총독부 예하 함경남도 도의회 의원
(前 朝鮮總督府 例下 咸鏡南道 道議會 議員)
경력前 연희대 의과대학 겸임교수
前 민주국민당 상임위원
前 민주당 대표상임위원
학력
학력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제국대학교 의과대학원
가족 관계
배우자충주 석씨 부인
친인척석진형(장인)

2. 일제 강점기 활동

김명학은 일제 강점기에 의사이자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353명의 공로자 중 한 명으로 기재될 정도로 지역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다.[2][3] 《조선인사흥신록》에는 "드물게 보이는 수재로 기술이 뛰어나고 품성이 순결"하다는 인물평이 실려 있을 만큼, 의술과 인품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았다.[2]

하지만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징병제 실시 감사 담화를 발표하고 흥아보국단 함남 지역 위원과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지내는 등 일제에 적극 협력하였다.[5] 이러한 행적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지역유력자 부문에 김명학을 포함시켰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김명학은 함경남도 영흥에서 출생하였고 함흥에서 성장하였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조선총독부 도지사를 지낸 기업인 석진형의 딸과 결혼했다.[2]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사 학위를 받았고, 1930년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공 분야는 외과였다. 경성의전 의학사 학위 이후 조선총독부 병원 외과에서 근무하다 1928년부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외과 교실에서 근무했다.[2]

1930년 경성제대를 사직하고 함흥으로 귀향하여 개업의가 되었다. 이후 함경남도 도회의원을 지내면서 지역의 명망 있는 유지로 활동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353명의 공로자 중 한 명으로 김명학이 기재되어 있다.[2][3] 《조선인사흥신록》에는 김명학이 "드물게 보이는 수재로 기술이 뛰어나고 품성이 순결"하다는 인물평이 적혀 있고, 치료와 연구로 대중의 신망을 얻어 함흥 지역 발전에도 공이 큰 것으로 되어 있다.[2]

평소 승마, 사냥, 스케이트, 여러 구기 종목을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함흥에서 함흥 축구단을 창단하고 단장을 맡는 등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4]

2. 2. 의사 활동 및 지역 유지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사 학위를 받았고, 1930년 경성제대 의과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공 분야는 외과였다. 경성의전 의학사 학위 이후 조선총독부병원 외과에서 근무하다가 1928년부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외과 교실에서 근무했다.

1930년 경성제대에서 사직하고 함흥으로 귀향하여 개업의가 되었다. 이후 함경남도 도회의원을 지내면서 지역의 명망 있는 유지로 활동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353명의 공로자 중 한 명으로 기재되었으며[2][3], 《조선인사흥신록》에는 "드물게 보이는 수재로 기술이 뛰어나고 품성이 순결"하다는 인물평과 함께 치료와 연구로 대중의 신망을 얻어 함흥 지역 발전에 공이 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소 승마, 사냥, 스케이트 및 여러 구기 종목을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함흥에서 함흥 축구단을 창단하고 단장을 맡는 등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김명학의 노력으로 함흥 축구는 전성기를 맞이했다.[4]

2. 3. 스포츠 활동

김명학은 평소 승마와 사냥, 스케이트 및 여러 구기 종목을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함흥에서 함흥 축구단을 창단하고 단장을 맡는 등 스포츠에 관심을 보였다. 함흥 축구는 이때 김명학의 노력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다.[4] 한국 전쟁 이후 남한으로 내려와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대한승마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대한민국 스포츠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2. 4. 친일 행적

일제 강점기 말기에 징병제 실시 감사 담화를 발표하고 흥아보국단 함남지역 위원과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지내는 등 일제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5]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지역유력자 부문에 선정되었다.

3. 해방 이후 활동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소군정 지역이 된 함흥에서 친일 우익 집단을 대표하다가[6] 미군정 영역으로 월남하여 김명학외과의원을 열고 원장으로 재직했다.

3. 1. 월남 및 의료 활동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소군정 지역이 된 함흥에서 친일 우익 집단을 대표하다가[6], 미군정 영역으로 월남하여 김명학외과의원을 열고 원장으로 재직했다.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대한승마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대한민국 스포츠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3. 2. 스포츠계 활동

김명학은 평소 승마와 사냥, 스케이트 및 여러 구기 종목을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함흥에서 함흥 축구단을 창단하고 단장을 맡는 등 스포츠에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노력으로 함흥 축구는 전성기를 맞이했다.[4] 광복 후에는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대한승마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스포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4. 평가

《조선인사흥신록》에는 김명학이 "드물게 보이는 수재로 기술이 뛰어나고 품성이 순결"하다는 인물평이 실려있다. 치료와 연구로 대중의 신망을 얻어 함흥 지역 발전에도 공이 큰 것으로 평가되었다.[2][3]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김명학이 수록되어 있다.[2][3]

일제 강점기 말기, 징병제 실시 감사 담화를 발표하고 흥아보국단 함남지역 위원과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지내는 등 일제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5] 이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지역유력자 부문에 선정되었다.

참조

[1] 뉴스 전 축구협회장 金明學박사 별세 조선일보 1969-04-24
[2] 뉴스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08-03-06
[3] 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08-03-06
[4] 서적 한국 축구의 영웅들 랜덤하우스중앙 2005-06-25
[5] 서적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민족문제연구소 2004-12-27
[6] 서적 해방전후사의 인식 5 한길사 200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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